잡학다식 아키비스트의 수시 건호스. :: 걷기왕 - 스포일러
영화.2017. 2. 8. 01:42



영화 걷기왕’ 의 주인공 만복은 아버지의 역사적인 첫 차에 그만 토를 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 소풍 가는 버스부터 배, 비행기, 오토바이, 소까지 안타본 것이 없지만 극심한 멀미 때문에 탈 수 없었다. 이런 선천적 멀미 증후군 때문에 만복은 2시간을 걸어서 고등학교로 등교한다. 만복의 재능을 알아본(?) 담임선생님은 만복을 학교의 육상부에 추천하고코치가 경보 선수로 만복을 받아들이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력과 열정. 정말 좋은 단어다. 나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가치관이고, 또한 즐겨 쓰는 말이지만 요즈음은 왠지 이상한 뜻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개인의 특성이나 취향 혹은 사회적 문제 마저도, 전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노력만능설의 신봉자들을 비아냥 거 리는 의미의 노오오오력’ 혹은 노력충’ 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또 젊은 청년들을 무보수로 착취하며, 열정이 있으면 부당한 일도 참을 수 있다는 소위 열정페이또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영화는 멀미 빼고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인 만복의 시선으로어느 순간부터 변질되고 왜곡되어버린 노력과 열정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한다만복이 육상부에 들어가게 되는 영화 초반부터 만복의 주변사람들(아버지부터 담임, 코치 어른들) 만복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만복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에, 그들은 만복을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하고 그냥 무심하게, 일을 처리하듯 다음 단계로 넘겨버린다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겪어봤던 상황이라고 수도 있겠다.      

또한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담임이 만에 희망 대학과 학과를 추천해주었던 경험이 있었다. 어찌되었건, 만복은 자기가 경보에 재능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육상에 점점 흥미를 붙이게 되고,학교 육상부의 고참이자 유망주라 있는 수지는 이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본다.       

수지는 처음엔 전형적인 타입의 노력파로 보인다. 죽기 살기로 하면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본인 또한 그런 노력으로 성공을 일궈낸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더는 운동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자신도 운동을 지속할 없음을 알지만, 평생 운동 하나에만 매진했기에 이제 와서 다른 진로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중반까지는 만복과 계속 갈등하는 인물이지만다시 육상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 만복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것이 무섭다고 하자 동질감을 느끼고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예선 경쟁했던 선수들이 실격되어 본선에 진출하게 만복. 서울까지 갈생각에 걱정이 앞서지만, 이내 걸어서 서울까지 전국체전에 참가하겠다는 마음을 굳힌다영화 속에서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으며,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무언가를 타야만 했던  만복이처음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장면이라 가슴이 뭉클했던 같다.

그러나 무리하게 만복을 따라 나섰던 수지가 만복과 사소한 다툼을 벌이다 대회 전날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고,  이에 만복은 결의를 다지고 대회에 임하게 된다. 이때 만큼은 코치도 듬직해 보이고, 아버지도 딸이 방송에 나온다고 동네방네 연락하는 만복이 그동안의 시련을 딛고 우승할 것처럼 보이지만, 무리한 훈련과 함께 걸어서 서울까지 피로가 겹쳐 만복은 초반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그만 다른 선수들과 함께 넘어지고 만다.        


어서 뛰라고 윽박지르는 코치들과 아픈 것도 참으며 이기기 위해 다시 일어서 걷는 선수들을 바라보다

만복은 생각한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는 여태 보인 모습 가장 해맑은 표정으로 심판에게 당당히 그만하겠다고 말하며 자리에 누워 버린다.


우리는 대부분 남이 정해준 목표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부터 그저 열심히 뛴다초등학교때는 좋은 중학교, 중학교에서는 좋은 고등학교고등학교에서는 이제 좋은 대학만 가면 끝날 알았지만 과연

이제 취업하기 힘든 세상이니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한다.      

그렇다면 취업하고 뒤에는?

이렇게 평생을 걸쳐 성과와 결과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세가 학습되고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열정과 노력이라는 말은 와중에 어느새 가슴 뜨거운 단어가 아닌, 나보다 뒤에 있는 같은 사람들을 채찍질하고 조롱하는 의미의 단어로 전락해버렸다. 무슨 일이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은 결국 최근 영화보다 영화 같은, 믿을 없는 사건으로 곪아 터졌다그렇기에 걷기왕의 만복이 우리에게 제시한 메시지는 더욱 의미가 깊다.

 

꼭 남보다 열심히 그리고 빠르게 앞서 가야만 하나? 

 

꼭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디는 것이 열정인가? 즐거운 열정은 없는 걸까? 

 

무엇보다그렇게 고통을 참고 버티며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순간만이 

의미 있는 삶의 순간이고 그런 삶의 방식만이 옳은 방식인가?  

 

나 또한 만복 아니, 그보다는 수지나 담임 선생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적이 있다.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은 좋지 않았던 형편 때문에 바쁜 대학시절을 보내야 했었다. 처음에는 그저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 지금을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당연히 즐겁지 않았다

계속 주변의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고,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더 잘나가는 친구를 보고 속상해 했다. 내가 우울하니 가족과도 다툼이 잦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을 놓아버렸다. 평생 이런 감정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즐겁고 유쾌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노는 거 안 빼먹으면서, 내 할 일도 열심히 했다. 어느새 주변에서 나는 학업도 챙기며, 알바로 생활비도 벌고, 학교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며 노는 것도 빼먹지 않는 특이한 놈이 되어있었다. 즐겁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점점 채워지면서 그때 깨닫게 되었다.   

 

 아 이런 게 진짜 열정이구나! ’

 

역설적이게도,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닮지 말아야 할 타입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인 만복의 친구, 지현이 가장 영화의 주제와 맞는 삶을 살고 있다. 겉으로는 그저 우등생에, 공무원을 희망하는 꿈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극중 누구보다 가장 잘 파악하고 있고, 그래서 꿈이 공무원이라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다그래서인지 오히려 상담 중 담임에게 힘들고 아픈데 왜 맨날 참아야 하냐며 되려 일침을 가한다.     

반대로 담임선생님은 맹목적으로 열정을 외치는 사람이다. 만복을 구박하던 아버지도 나중엔 만복을 걱정하고, 코치도 마지막엔 멋진 말과 함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유독 담임만큼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는유형의 열정에 집착한다. 앞서 언급했던 노력신봉자들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인물이라고 하겠다.

공교롭게도, 만복을 보면서, 비슷한 제목의 영화 족구왕의 주인공 홍만섭이 자꾸만 떠올랐다. 만섭과 만복은 이름 말고도 닮은 점이 많은 캐릭터이다. 만섭도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교에서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즐거운 것 하면 안되는 거냐고 항변하는 캐릭터이다.     

공무원 준비하라는 선배에게 연애가 하고 싶다고 하고, 총장에게 족구장을 다시 만들어 달라 건의하며, 학교에 족구 붐을 일으킨다. 또한 학교 퀸카가 자기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백한다. 필요 없으면 하지 않는 풍토가 만연해진 세상에서 그저 가슴 뛰는 대로 최선을 다한다.

아마 만섭과 만복 둘 다, 삶의 방식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에게 알려줬던 캐릭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우연히도 홍만섭을 연기한 배우 안재홍이 소순이 역할로 특별 출연한다.

 

영화 후반부에 만복을 걱정하는 담임을 달래며 코치는 이런 대사를 한다.

 

인생은 정해진 코스가 아니라,

자기만의 길을 찾는 과정이다.  

 

똑같은 길에서 남과 경쟁하며, 최고를 꿈꾸는 것에 지쳤다면,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천천히 여유 있게, 나도 걷기왕을 꿈꿔본다


p.s 

이거 어느회사 입사지원때 과제로 야심차게 쓴 감상입니다. 여태 연락안오는거 보니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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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