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다식 아키비스트의 수시 건호스. :: 상수역 이리카페
여행.2017. 1. 24. 23:06


내가 이리카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1. 군대를 전역하고 아직 빡빡머리가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때였다. 나보다 늦게 군대를 가기 시작한 친구들이 슬슬 전역을 앞두고 홍대 앞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아직 사회물(?)을 덜 먹어서 사람이 많고 핫한 홍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친구가 자신 있게 자기가 좋은 카페를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자고 했다. 홍문관을 지나 홍대주변보다 훨씬 한적한 상수역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난 친구의 그 자신만만한 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에 세발자전거 타며 구석구석 돌아다녔을 것 같은 평범한 골목에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마치 인테리어에 신경 쓰지 않은 듯 신경 쓴 이리카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마치 군 복무시절 즐겨보던 남성잡지에서나 소개되던 느낌적인 느낌이 있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어디 헌책방과 재개발단지라도 털어온 것인지, 테이블부터 의자, 책장, 그 안에 꽂혀있는 헌책들까지 하나같이 다 자기만의 앤틱함을 발산하며 그 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강렬했는데, 마치 스트리트 패션 잡지에서나 볼 법한 홍대인의 자부심을 세우며, 맥북을 펴놓고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은 우리도 그 예술적인 무리에 편입된 것 같은 감성을 충만하게 느끼게끔 해주었다.

 

처음엔 적잖이 컬쳐쇼크를 먹은 나였지만, 이내 그 분위기에 흐물흐물 녹아들어갔고,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여자가 생기면 꼭 같이 오겠노라 다짐하였다. 친구도 알고 보니 마음에 두고 있었던 대학선배가 끌고 왔던 곳이라고... 역시나 짝사랑에 얽힌 장소는 더욱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 뒤로, 내게 누군가 홍대 괜찮은 곳 좀 아냐?‘ 고 물을 때 자신 있게 추천할 비장의 카드가 되어주었다. 실제로도 마치 어서 돈을 쓰고 나가라는 듯 대로변에 우악스럽게 자리한 수많은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보다 이쪽이 훨씬 분위기 있고 조용히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이유로 항상 자주 들리지는 못해도 가끔씩 멍하니 앉아서 힐링할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마음 아픈 것은 이 사랑스러운 카페가 가장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양이란 점이다. 이미 서교동에서 상수로 한차례 피난을 와 터를 잡았건만, 지난 2월 또 이사를 가야할지 모른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장소를 핫플레이스로 만들어준 장본인이 결국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이리를 밀어낸 자리에 또다시 의미 없는 프렌차이즈가 들어온다고 과연 지금 같은 생명력을 지닐 수 있을까. 그럴거 라면 차라리 우리집 뒷마당으로 이리 오라 손짓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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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건호스